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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인 튀르키예 여행이 시작되는 오늘 아침, 기대와 흥분 때문에 들뜬 마음으로 6시쯤 기상했다. 아내와 같이 식당에 내려가 호텔 아침 식사로 흔히 나오는 빵과 햄, 치즈, 우유와 과일 등으로 아침식사를 하였다. 빵은 여느 유럽 빵 못지않게 맛있는데 치즈는 너무 짜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고기와 유제품을 장기 보관하기 위해 소금에 절인 습성이 이어진 것이리라. 창가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는데 바깥은 아직 껌껌하다. 이스탄불 시민들은 아직 잠자고 있는데 외국인 관광객들만 해뜨기 전부터 분주한 느낌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차에 오르니 가이드는 튀르키예어 아침 인사에 대해 얘기했다. “좋은 아침균나이드”. “안녕하세요메라바”, “고마워요촉사울”. “너무 고마워요는 “촉촉사울”

     

    둘째 날의 원래 계획은 오전에 아야소피아 성당을 방문하고 앙카라주()의 전통 마을인 베이파자르를 거쳐 수도 앙카라로 가는 것이었지만 가이드가 일정을 조정하여 성소피아 성당은 어젯밤에 다녀왔고 오늘 오전엔 돌마바흐체 궁전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원래는 일정상 마지막 날 오후에 가는 걸로 되어 있었지만 오후에 갈 경우 관람객이 많아 대기 시간이 길어지므로 이른 시간에 여유 있게 가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했다. 역시 한국인은 어디를 가나 빨리빨리가 우선이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조선시대의 경복궁과 같은 터키의 정궁이었다. 입구부터 보안검색이 엄격했는데 최근에도 이스탄불에서 테러가 발생하는 등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쿠드드족에 의한 테러가 종종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검색대를 통과하여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대리석 건물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과 많이 닮았다 생각했는데 실제 본 떠 지었다고 한다. 궁전 건물의 외벽은 정교하고 화려하게 잘 조각되어 있었다. 오스만제국의 건축가들이 베르사이유 궁전 못지않은 대리석과 화강암 조각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프랑스에서 기술을 배우거나 석공들을 초빙하여 짓게 하였을지도 모른다.

     

    궁전은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 바로 옆에 서있다. 원래는 해변의 작은 만을 채워 조성한 정원으로 술탄의 휴식처였는데 제31대 술탄 압둘 마지드가 1853년에 대리석으로 새 궁전을 짓게 하였다고 한다. ‘돌마는 채워 넣는다는 의미이고 바흐체는 정원이라는 뜻으로 둘을 합쳐 돌마바흐체 궁전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입구를 거쳐 궁전으로 가는 길은 작은 조각돌들로 채워져 있었고 길옆 잔디밭은 단아하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잔디밭에는 군데군데 동그라미 길이 조성되어 있어 아기자기한 멋이 있었고 둘레 나무들은 백 년이 넘은 고목들로 여름이 오면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줄 것 같았다.

     

    궁전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양말 위에 비닐 신을 신었다. 수많은 관람객의 발길로 카펫이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함일 것이다. 입구에는 누구나 무료로 하나씩 가져갈 수 있는 가이드북이 비치되어 있었는데 여러 언어들 가운데 한국어 가이드북도 있어 반가웠다.

     

    관리인들이 엄숙하게 경비를 서는 궁전내부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였다. 진귀한 보물들과 골동품들 관리와 보존에 허점이 생길 수도 있고 사진 촬영하느라 포즈 취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관람질서가 흐트러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궁전 안에는 당대 유명화가들의 그림과 금으로 장식된 벽과 천장이 관람객을 압도했다. 수많은 화병과 시계, 크리스털 촛대, 샹들리에, 가구와 커튼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는데 한 때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궁전이었다는 명성에 걸맞았다. 수많은 보물들은 유럽각국과 중국 등 여러 나라에서 보내온 것인데 당시의 강대국이나 문명국들이 자국에서 최고 수준의 것들을 보내온 것이라 고급스럽고 고품질이었다. 도자기가 특히 화려하였는데 중국, 일본에서 만든 것은 있으나 우리나라 것은 없어 다소 아쉬웠다. 1850년대 조선의 사정을 생각하면 이곳에 기념품을 보낼 처지가 못 되었을 것이다.

     

    술탄의 집무실과 회의실 및 대기실에는 카펫이 깔려있는데 일부는 유럽에서 가장 큰 카펫이라고 한다. 하나하나가 국보급 수준인 듯했고,, 욕실도 옥돌과 대리석을 사용해 화려했다. 술탄의 가족들과 후궁들이 거처하던 할렘을 둘러보았는데 조선시대 대비 격인 술탄의 모후의 방은 엄청 호화로웠으나 다른 방들은 생각보다 소박하고 작아 보였다.

     

     

    이 궁전은 한때 대통령궁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튀르키예 건국의 아버지 케말 아타튀르크 대통령의 집무실은 할렘의 방 하나를 개조한 것인데 보존되어 방의 시계가 그의 사망시각인 9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건국대통령의 위대한 업적이 얼마나 대단하면 튀르키예 국민들의 깊은 존경심을 자아내고 있는 것일까. 대통령이 집무실 술탄의 방을 사용치 않고 할렘의 방 하나를 사용한 겸손한 자세가 국민들의 마음을 얻은 것은 아닐까.

     

    연회장에는 초대형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매달려있는데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로 보내온 것이라고 한다. 이 궁전의 개축이 시작된 1853년은 부동항을 찾으려는 러시아의 남진에 대항하여 오스만제국 영국 사르데냐 연합군이 크림반도 흑해를 둘러싸고 싸운 크림전쟁이 발발한 해였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고 있었고 오스만제국과 연합하여 크림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빅토리아여왕이 우호 친선을 위해 샹들리에를 선물했던 것으로 보인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그레이트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중 하나였다. 크림전쟁 이전에도 오스만 제국의 최대 숙적은 러시아였다. 오스만제국은 전성기에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지역을 차지했으나 러시아와의 13번의 전쟁에서 크림전쟁 외에는 대부분 패전하여 영토를 내주었어야 했다. 러시아가 흑해함대를 만들어 보스포루스 해협 통과를 시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술탄이 해협 바로 옆에 궁전을 지은 것은 러시아함대의 해협 통과를 저지하려는 의지의 발로였을지도 모른다.

     

    궁전 내부를 보고 옆문으로 나와 바다를 바라보니 해변에 새 궁전을 짓게 한 또 다른 이유가 짐작이 갔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푸른 바다 위에 수많은 선박들이 오고 가고 생동감이 넘쳤다. 술탄은 갑갑한 궁전에 살다가 바다 옆에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기존의 톱카프 궁전에서도 멀리 보스포루스해협의 바닷물길이 보이기는 하지만 좀 더 넓은 물가로 가서 큰 세상을 마주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돌마바흐제 궁전을 지을 무렵 오스만제국은 물가에 선 아이처럼 아슬아슬한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전성기를 지나 국력이 쇠퇴하고 있는 시기였던 것이다. 러시아의 공세와 동유럽 내 피지배 국가들의 독립운동 심화로 오스만제국의 영토는 축소되고 있었고 서유럽의 산업화와 과학기술 발전에 크게 밀려 생산력은 낙후되고 무기 수준에서도 유럽에 크게 밀리고 있었다.

     

    술탄 압둘 마지드의 해법은 서구화와 근대화였다. 물론 부국강병을 위해 서구의 제도와 기술을 배우고 좋은 점을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기는 했으나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한 호화로운 궁전을 짓는 것은 너무 나간 것이 아니었을까. 대원군이 왕실의 권위를 세운다며 경복궁을 무리하게 중건하다가 가뜩이나 어려웠던 재정을 파탄지경에 이르게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실제 돌마바흐체 궁전이 완공된 후 오스만제국은 크림전쟁 전비 조달의 충격까지 겹치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궁전 정면 입구에는 4층 시계탑이 우뚝 서있다. 화려한 조각과 장식을 갖춘 시계탑은 1890년 술판 압둘 하미드 2세 때 세워진 것인데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엘리자베스 타워의 시계탑을 연상시킨다. 세계경영을 한 대영제국에게서 오스만제국은 시간관념의 중요성을 배운 것일까. 시계탑은 단체 관광객들에게 약속 장소로서의 역할도 해서 가이드가 말한 대로 이곳에서 다시 일행을 만났다.

     

    관람을 마치고 궁전 입구로 나오니 수학여행 온 초등학교 선생님과 어린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 일본인이냐고 물었다. 일본인 단체관광객은 별로 보지 못했지만 과거에는 많이 왔던 모양이다. 일행은 버스를 타고 보스포루스 해협의 다리를 건너 소아시아 쪽 이스탄불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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